1876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브레슬라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마티아스 체육관에 다니며 1886년 장식화가 게오르그 하인체에게 사사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브레슬라우의 예술 공예 학교에서 교육을 계속했으며 하인리히 이르만, 폴 쇼벨트, 알브레히트 브뢰어 등의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894년 뮌헨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한 뮌처는 칼 라우프와 오토 자이츠 같은 유명 예술가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군 복무 중에는 야외 회화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던 폴 호커의 회화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뮌처는 1896년 이곳에서 자신의 마스터 스튜디오를 얻기도 했습니다.
1898년, 그는 루드비히 스톨베르크가 주최한 첫 번째 스톨베르크 수집가 그림 디자인 공모전에서 1000마르크의 상금을 받은 두 명의 수상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1899년부터 뮌처는 숄레 예술가 그룹의 일원으로 뮌헨 글라스팔라스트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또한 뮌헨 주간지 “유겐트” 및 풍자 잡지 “심플리시무스”와의 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1900년부터 1902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예술적 발전을 공고히 했습니다. 1903년, 그는 마리 테레즈 드레센(마리 테레즈 드레센, 본명 베스텐호프)을 만나 1년 후 엄청난 스캔들 끝에 결혼했습니다. 이 스캔들은 드레센 부인과 남편의 이혼으로 이어졌습니다.
1909년 뮌처는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회화반의 책임자가 되어 1932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기간 동안 뒤셀도르프 지방 정부를 위해 벽화와 천장화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1915년 전선에서 전쟁 화가로 활동했고 1917년에는 자원했지만 참전하지는 않았습니다.
1938년 뮌처 가족은 홀츠하우젠 암 아메르제로 이주했습니다. 뮌처의 작품은 뮌헨의 노이에 피나코테크,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 뒤셀도르프의 슈타디슈 쿤스트 뮤지엄, 쿤스트베라인 바젤 컬렉션 등 여러 유명 박물관과 컬렉션에 전시되었습니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뮌처는 뮌헨의 하우스 데어 도이첸 쿤스트에서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주최한 독일 미술 전람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아돌프 히틀러에게 작품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에는 뮌헨 예술가 협동조합에서 30점의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뮌처는 1944년 제국 대중 계몽 및 선전부로부터 영예를 안은 인물 목록에 포함되었습니다.
뮌처의 내러티브 스타일은 그의 그래픽, 특히 마인츠의 숄츠 출판사를 위한 동화 삽화에서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는 독일 공예가 협회(Deutscher Künstlerbund)의 회원이기도 했습니다.